타인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태도
우스갯소리로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있다. 동료의 자산 가격이 폭락했을 때, 행복해 보였던 친구의 헤어짐 소식을 들을 때 등등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면서 행복을 느끼는 심리가 있는데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de)’라고 한다. 샤덴 (Schaden)은 손실과 고통을 의미하고 프로이데 (Freude)는 환희와 기쁨을 말한다.
반대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타인의 행복은 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는 자신이 아닌 남의 상황에 따라 나의 감정이 달라지기도 한다. 타인의 행복할 때와 불행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태도에 관해서 여러 가지 좋은 글들이 많이 있다. 여기서는 책 ‘비움 (The Yoga Book Vol. 1) - 오쇼 라즈니쉬’에서 관련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본문에서 글을 발췌하고 편집하였고 마지막에 필자의 생각도 첨부하였음을 밝힌다.
1. 타인의 행복
행복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다. 보통은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냐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정반대이다. 주위 사람의 행복한 모습을 볼 때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 자신이 행복해야 하는데 상대가 행복을 빼앗아 갔다고 느낀다. 상대가 이기고 나는 졌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나를 속였다고 생각한다. 저 사람은 행복한데 나는 불행하다고 느끼고 인생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행복한 친구를 보면 그의 행복에 질투심을 느끼고 자신의 불행을 한탄한다. 자신도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나 겉모습이요 가면일 뿐이다. 행복한 친구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면 자신의 행복이나 평화, 평정은 물 건너간다.
그러나 질투심은 마음에 지옥을 만든다. 타인이 지옥 불을 만드는 게 아니다. 자신이 지옥 불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보면 자신의 고통과 지옥은 자신이 원인이다. 이를 이해해야 한다. 타인에게 자신의 불행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지 말라.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것은 진실로부터 도피하는 행위이다.
나의 불행에 대한 책임은 오직 나에게만 있다. 절대적으로 나에게만 있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원인을 찾으라. 누구도 불행을 원하지 않는다. 내면에서 원인을 발견했으면 원인을 밖으로 꺼내어 버려라. 아무도 나의 행복을 방해하지 않는다. 행복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은 경쟁이 아니다. 누군가 부자라면 자신도 부자가 되기 쉽지 않다. 부는 양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권력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권력 있는 사람이 되기 어렵다. 권력은 경쟁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누군가 행복하다면, 이는 자신이 행복할 수 없다거나 상대가 자신의 행복을 빼앗아 간 것이 아니다. 행복은 다른 사람이 써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다. 행복은 무한한 양으로 존재한다. 사람들이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다. 행복의 세계에서는 경쟁이 존재할 수 없다.
타인이 행복하면 다정한 마음으로 같이 행복해하여야 한다. 그러면 자신의 마음에도 행복의 문이 열린다. 행복한 사람과 다정하게 지내면 즉각 상대의 행복이 나에게 전해진다. 그래서 당장 자신의 행복이 된다. 행복은 어떤 물건이나 사물이 아니다. 손아귀에 쥘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행복은 나누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행복하면 그 행복을 나눌 수 있다. 아름다움은 행복한 이의 나눔에 있지 않다. 아름다움은 내가 함께 나누는 데 있다. 이것이 자신의 주변에 천국을 만들 수 있는 비밀이다.
행복한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그의 행복에 전염된다. 행복한 사람에게서 꽃이 피어나고 자신의 마음은 다정해진다. 행복한 사람이 다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나를 몰라도 상관없다. 행복이 나에게 흘러들어 오고 이를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위에 행복이 가득할 때 나는 평화로워진다.
2. 타인의 불행
사람들은 보통 행복한 사람을 보면 질투를 느끼고 미묘한 경쟁을 시작한다. 행복한 사람을 보면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항상 불행한 사람을 고른다. 불행한 사람과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불행한 사람을 보면 우월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찾는다. 항상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은 꺼리고 자신보다 떨어지는 사람을 찾는다.
불행한 사람에 대해 느끼는 감정으로 자비심과 연민이 있다.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하는가? 연민은 친구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친구에 대한 사랑, 곧 우애는 타인과 하나가 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친구처럼 되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울고 있는 사람 옆에 가서 같이 울어주면 우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가? 불행한 사람 옆에 가서 같이 불행해 하면 불행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가? 아니다, 그저 불행을 배가할 뿐이다. 불행과 불행이 만나서 두 배 이상의 불행이 나오는 것이다.
불행한 사람에게 연민을 보여주는 행위는 내면 깊은 곳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잔꾀이다. 연민은 자비가 아니다. 연민은 우애의 한 표현일 뿐이다. 이 점을 명심하다. 사람은 우울한 사람이나 슬픈 사람, 불행한 사람에게 우애나 연민을 보내면서 속으로는 행복해한다. 연민을 보내면서 속으로는 항상 행복해한다. 이는 간단한 산수이다. 상대가 행복하면 나는 불행을 느끼지만 상대가 불행하면 나는 속으로 행복을 느낀다. 물론 속으로 느끼는 행복은 표현하지 않는다. 아주 예민하게 관찰해보면 나의 연민 속에서 어떤 행복감이 들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연민을 보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기분 좋은 일이다.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내가 더 높고 우월한 것이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연민을 표현할 때 기분 좋아한다. 기운이 난다. 내가 저렇게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감사해한다. 누군가 죽으면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고마워한다. 연민의 마음이야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전혀 돈 드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민은 어떻게 보면 불행을 사랑하는 것이다. 불행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한 사람에게 연민을 표하는데, 이 사람이 갑자기 ‘걱정 마’라고 말하면서 기운을 내면 연민을 표했던 사람은 당황한다. 연민을 보낼 기회를, 자신이 우월하고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자비는 완전히 다르다. 자비심은 상대를 진정으로 돕고자 하는 마음이다. 상대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고자 한다. 상대가 불행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자 한다. 이 일에 대해 내심 행복해하지도 그렇다고 불행해 하지도 않는다. 상대와 같이 불행해 한다고 상대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행복해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으므로 행복해하지도 않는다. 상대가 지금 불행한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자비심은 상대가 불행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뜻한다. 자비심은 상대라는 존재로 향한다. 자비로운 사람의 관심은 상대의 불행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는 상대를 사랑한다. 상대의 불행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그는 상대를 불행에서 빠져나오게 할 뿐, 같이 불행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불행한 사람과는 같이 불행해 하지 말라. 불행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와주라. 결코 불행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 불행에는 어떠한 애정도 보내지 말라. 불행에 초연하라. 자비란 대상에 초연하는 마음이다. 손을 내밀되 초연하라. 상대를 돕되 불행해 하지도 행복해하지도 말라. 불행도 행복도 결국 같은 것이다. 상대의 불행에 같은 불행을 보여준다 해도 속으로는 행복해하고 있다. 행복도 불행도 다 놔야 한다. 자비는 마음에 평정을 가져온다.
3. 내면의 태도에 대한 단상
자아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한다. 경험 자아, 기억 자아, 배경 자아 등이 알려져 있다. 경험하고 기억하는 자아를 셀프(self), 즉 에고(ego)라고 한다. 끝없는 셀프 토크 (self talk)로 타인에게 보고할 만한 (something to reportable) 것들로 스토리 텔링을 만든다. 여기에서 에고는 프로이트가 말한 에고와는 차이가 있다. 이 에고는 타인과의 구별되는 개별 자아로서의 특성을 가진다. 남들보다 더 우위에 서 있는 것이 목적이므로 이기는 것에 방점을 둔다. 타인의 행복에 질투심을 느끼고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에고가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남의 불행에 본인이 행복감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에고의 특성으로 가지는 감정 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존재의 중심에 있는지 아니면 에고에 치우쳐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만 잘 알아차려도 질투심이나 괴로움과 이상한 행복감 같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이런 특성으로 타인의 행동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좋은 일이 있어서 타인에게 얘기하는 것도 에고의 작동이다. 남에게 자랑하고 과시하는 것은 전형적인 행동이다. 자랑하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그다음에 이어지는 타인의 마음이 문제이다. 그 사람은 나 때문에 괴로워할 수도 있고 심한 경우 나의 성공이나 행복에 대해 저주할 수도 있다. 즉 불행해 하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행복한 일이 있다고 해서 남에게 이야기하지 말자.
나의 불행도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라면 타인에게 털어놓지 말자. 타인은 기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의지했던 사람에게만 얘기했던 이야기가 모든 사람들에게 퍼져있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는가? 나의 몰락과 불행이 그들에게는 가십거리에 불과하거나 시원하게 생각하고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농담처럼 퍼지고 있는 말이 있다. “속상해서 빵을 샀어”에 대한 상대방의 답으로 공감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생각해볼 것이 있다. 상대방이 본인의 속상함에 공감을 하길 기대해서 물어보는 자의 생각은 무엇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안 좋은 감정을 상대방도 느껴야 한다는 것인가? 그것도 또한 매우 이기적인 생각이다. 내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걸 얘기하는데 남도 같이 힘들어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속상함을 남들이 같이 공감해주길 바라는 데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치부한다. 이 역시 매우 본인 중심적인 사고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대방이 항상 내 말만 들어주고 내 편이 되어야 하며 나의 감정에 동조해주길 바라는 사람도 이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윗글에서와 같이 남이 행복할 때 나도 같이 행복해지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약간의 질투심이나 기분 나쁨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러한 것이 없다면 타인의 행복한 기운에 그냥 영향을 받으면 된다. 내가 행복한 것이 중요하다.
타인의 불행을 마주할 때 정서적으로 동조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그러한 불행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행복이라는 감정은 신나고 들뜬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고요한 상태가 바로 행복이라고 한다. 흔들리지 않고 편안한 감정이 바로 목적지이다. 나의 감정이 변덕스럽지 않고 나의 마음을 제대로 볼 수 있으며 타인의 행동 또한 이해한다면 그 목적지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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